드라마 ‘라이벌’부터 예능 ‘솔로지옥’까지: 막장 TV 쇼가 시청자를 홀리는 법
영국 카밀라 왕비의 최애 드라마라는 타이틀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1980년대 영국 상류층, 그중에서도 가장 콧대 높은 귀족들의 추악하면서도 매혹적인 이면을 까발리는 훌루(Hulu)의 시리즈 ‘라이벌(Rivals)’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질감의 리얼리티 쇼가 묘하게 비슷한 맥락으로 시청자들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바로 넷플릭스의 ‘솔로지옥4’다. 영국의 가상 카운티 럿셔(Rutshire)를 배경으로 한 치열한 치정극과 스마트폰 하나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외딴섬의 연애 리얼리티. 겉보기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이는 이 두 쇼는 흥미롭게도 가장 완벽하게 세팅된 인간들이 보여주는 ‘예상치 못한 날것의 감정’이라는 동일한 무기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질리 쿠퍼의 발칙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라이벌’의 중심에는 루퍼트 캠벨-블랙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올림픽 승마 국가대표 출신의 보수당 의원, 그리고 작중 ‘영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묘사되는 그는 굳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 오만한 매력의 소유자다. 그를 연기한 배우 알렉스 하셀의 설명처럼, 루퍼트를 감싸고 있는 완벽한 핏의 새빌 로 수트와 던힐 액세서리, 애스턴 마틴과 혈통 좋은 종마들은 그가 뿜어내는 거부할 수 없는 권력과 ‘올드 머니’의 상징이다. 시즌 1에서 루퍼트가 자신의 숙적인 졸부 바딩엄 경(데이비드 테넌트 분)의 미디어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송사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난장판은, 엄청난 부와 권력이 인간의 비열한 행동들을 얼마나 감쪽같이 덮어줄 수 있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계급과 자본으로 철갑을 두른 ‘라이벌’의 인물들이 그렇듯, ‘솔로지옥4’ 역시 철저하게 우월한 매력 자본을 쥔 이들의 무대다.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재원, 김정현, 박수지 PD는 이 쇼가 애초에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시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출연자의 외모를 1순위로 두고 섭외했다는 김재원 PD는 이들을 우스갯소리로 ‘연애 시장의 프리미어리거’라 칭했다. 처음엔 그저 유명세를 얻으려 나온 선남선녀들의 뻔한 플러팅 경연대회쯤으로 여겼던 시청자들은, 어느 순간 이 ‘핫’한 남녀들이 가드를 훅 내리고 바닥까지 감정을 드러내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화려한 쇼윈도 뒤에 숨겨져 있던 뜻밖의 진심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이 두 쇼가 등장인물의 방어기제를 무장해제시키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 교집합을 이룬다. ‘라이벌’이 상류층이라는 그들만의 폐쇄적인 리그 안에서 위선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낸다면, ‘솔로지옥’은 철저한 물리적 고립을 선택한다. 제작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무개입’의 원칙은 이 고립감의 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일상과 단절된 섬에서 오직 남녀 간의 상호작용에만 집중하게 만들었을 때 비로소 진짜 감정의 깊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지난달 공개된 시즌4가 유독 뜨거운 화제를 모은 것 역시 육준서와 이시안 같은 출연자들이 카메라의 존재조차 잊은 채 완벽하게 몰입했기 때문이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잠든 장면은 현장의 MC들과 제작진마저 경악하게 만들며 SNS를 달궜고, 이는 쇼가 통제 불능의 진심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물론 이토록 아찔한 날것의 순간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한 물밑 작업은 80년대 영국의 미디어 전쟁 못지않게 치열하다. 500명이 넘는 1차 지원자들 사이에서 ‘솔로지옥4’의 최종 라인업을 꾸리기 위해 30여 명의 제작진은 각자의 취향을 무기로 살벌한 난상토론을 벌여야 했다. 특히 무인도라는 거친 환경과 묘하게 어울려 시즌1부터 무려 4번의 끈질긴 구애 끝에 섭외해 낸 육준서의 사례는, 쇼의 폭발력을 쥐락펴락할 매력적인 인물을 체스판에 올리기 위한 제작진의 집요함을 엿보게 한다.
알렉스 하셀은 ‘라이벌’ 시즌 2를 예고하며 “결국 정상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특권과 매력에 기대어 유야무야 넘어갔던 과거의 오만함이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지 지켜보는 것은 꽤나 서늘하면서도 짜릿한 구경거리다. 영국의 거만한 귀족이 권력을 쥐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나, 한국의 외딴섬에서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진 청춘들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감정의 소용돌이나 결국 그 궤적은 맞닿아 있다. 화려하게 치장된 포장지가 찢어지고 가장 나약하고도 본능적인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찰나, 우리는 그들이 치르는 대가를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다.









